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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비유


천국은 마치 (가라지와 겨자씨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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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128회 25-02-1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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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마치 (가라지와 겨자씨의 비유)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는 경우란 어떤 상황인 것일까?
가라지와 곡식은 그 생김새가 매우 비슷하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분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완전히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는 혹시나 오인하여 뽑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아니면 혹여 덧뿌려 자라난 가라지의 뿌리가 곡식과 얽혀, 뽑아낼 때 곡식까지도 딸려 뽑혀 나온다는 그런 이야기였던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답은 전자에 가깝다고 본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를 생각해보자면 말이다.
 
집 주인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가라지와 곡식은 주의 종들을 의미한다.
또한 드물게도 이 비유에서는 천사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종이 되어 곡식과 가라지를 분별하여 추수하는 일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 밭에서 자라나는 좋은 씨란 최소한 주께 인정받는 하나님의 종이라 보아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반면에 가라지는 어떠한가. 그들은 처음부터 나쁜 씨앗이니 사실 그 결말은 처음부터 멸망임이 정해져 있던 것일까?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원수가 뿌린 이 가라지 또한 예수님의 밭에서 같은 물과 햇빛과 비료를 먹고 자라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주의 종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독이 담긴 열매를 맺어 후에 걸러져 불살라지게 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 비유의 핵심을 살펴보자면 이러하다. 집 주인은 추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이를 분간한다는 것이다. 농사꾼의 입장으로써는 가라지를 솎아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곡식의 성장을 저하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그리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보통 농사꾼과는 사뭇 다른 점이 있으신 듯하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가라지가 곡식의 성장을 더디게 한다거나 하는 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시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성장에 있어 그런 역경과 함정들이 필요하다고 여기시듯 보일 때가 종종 있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중요히 여기시는 것은 결국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열매를 맺기 전까지는 곡식과 가라지처럼 진배없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천사들마저도 혼동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므로 섣불리 그들을 판단하여 내치지 않으신다. 다만 그들이 열매로써 스스로를 입증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부연 설명을 하시듯 이어지는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천국은 마치 이러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모든 씨보다 작았지만 그 어떤 나물보다도 커져 새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 나무는, 참된 하나님의 종이 되어 교회의 역할을 하는 저 열매 맺은 곡식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여자가 가루 서말속에 넣어 부풀게 한 누룩은, 사람들에게 헛된 것을 불어넣어 실질적인 성장 없이 무의미하게 겉모습만 부풀리는 그 모습이 딱 저 독을 품고 있는 가라지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이것은 정확히 거짓 선지자의 모습과 일치한다.
이로 보건대 이는 마치 저 곡식과 가라지가, 종들이 모두 자라난 그 후의 모습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앞선 비유와 이 비유 모두 의미하고 있는 바는 동일하다.
두 개체가 몹시도 유사한 모습이고 또한, 그 이면을 살펴보자면 이는 오히려 정반대의 성질을 띠고 있다는 것까지 말이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에 아 처음부터 좋은 씨, 나쁜 씨가 정해져 있다면 내가 노력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께서는 처음부터 결말이 정해져 있다 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 가라지 비유는 예수님께서 종들을 바라보시는 시각에 대해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사실 예수님 보시기에는 저 겨자씨와 누룩처럼, 좋은 씨와 가라지처럼 그 처음과 끝이 사실은 명확하게 보이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마지막 때까지 기다리시므로 일말의 가능성을 베풀어주신다.
결국 선택은 그들의 몫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 쌓여 열매를 맺고 종국에는 양과 염소로 나뉘게 된다.
 
그날에야 그들은 억울하다며 울부짖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을 돌아보자면 우스울 뿐이지 않겠는가.이는 비단 저들의 문제만을 말씀하심이 아니다. 주께서는 추수 때에야 이들을 분간하실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이전에도 분간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심이 무엇 때문이겠는가. 또한 두아디라 교회 에게도 거짓 선지자 이세벨을 제해 버리라 경고하지 않으시던가. 우리가 가라지나 누룩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또한 그들을 분별해야만 한다고. 분명 예수님께서는 그리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혹여 천국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커지기만 하면 다 좋은 것이라고 헛된 누룩마저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잘 돌아보길 바란다. 만약 그러했다면 참으로 이 비유를 듣고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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