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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비유


천국은 마치 (먼저된 자 나중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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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337회 25-09-01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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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마치 (먼저된 자 나중된 자)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영생을 얻고 싶었던 어느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로 나아와 묻게 된다.
스러질 한낱 재물을 무려 하늘에서의 보화로 환전할 수 있으리라는 말을 듣고도 그 많은 재물로 인함인지 그는 그저 근심하며 돌아가게 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렵다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를 들은 베드로는 부자 청년이 하지 못한 어려운 일을 자신들은 이미 해내었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어쩐지 고양되어 보이기도 하다. 그리고는 자신들에게는 어떤 보화가 있을지 기대하며 주께 묻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베드로가 기대하던, 아니 그 이상의 말씀을 해주신다.무려 열두 보좌에 앉아 사람들을 심판하는 권세를 얻을 것이며, 심지어 버린 것들의 여러 배를 받을 것이고, 거기에 영생 또한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대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면 베드로는 몹시 기뻐하며 더욱 열심을 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무언가 더 말해주어야 한다고 여기신 듯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하시며 한가지 비유를 베푸시어 설명해주신다.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비유에는 총 세 부류의 등장인물이 존재한다.
하나는 집주인이고 나머지 둘은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이다.
우선 이 집주인을 살펴보자면 매우 범상치 않은 자임을 알 수 있다.
다섯 차례에 걸쳐 남겨진 자들을 고용하고 한 시간 뒤면 끝날 일임에도 계속해서 품군들을 구하는 모습도 그렇거니와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를 구분치 않고 같은 삯을 준 의도도 그러하고 나중 된 자들에게 먼저 동일한 삯을 주어 먼저 된 자들을 격동시키는 듯한 모습도 의중을 알기 힘들다. 분명한 것은 이 집주인에게는 노동력이 그렇게 큰 가치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제 먼저 된 자를 살펴보자. 이 먼저 된 자는 분명 먼저 선택되어진 만큼 무언가 나중 된 자들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을 것이라 보여진다. 아니 사실 그렇지 않을지라도 스스로는 분명 그리 생각하지 않겠는가.
뛰어난 일군인지에 대한 것은 유보하더라도 더 많은 시간 땀 흘려 일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때문에 이들은 나중 된 자들이 자신들과 같은 삯을 받게 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점점 모종의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대감을 배반하자 여지없이 분개하고 만다. 애초에 약속된 삯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느정도 유도된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이들이 저러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결국 그들의 마음에 있다.
그들은 자신이 더 뛰어난 일군이며 또한 더 많은 일을 하였으므로 마땅히 더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그 대우란 삯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가치 기준은 곧 삯의 많고 적음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노동에 마땅한 삯을 주지 않는다면 누가 그 일을 하려들겠는가.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많은 돈을 준다면 어떠한 일이든지 하는 것이 당연한가?
혹은 적은 돈을 받는다면 그 일이 무가치하고 불필요한 일이라 느끼게 되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일이라는 것의 가치가 무조건 그 삯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삯 외에도 더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먼저 온 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는 듯하다. 저들에게는 오직 삯만이 가치로 여겨진 것이다.
때문에 집주인의 선함을 알아보지 못하고 되려 대적하여 원망하게 되는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다.
 
반면에 나중 된 자들을 살펴보자. 이들은 분명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고용되고 삯 또한 후히 받으니 그들에게는 삯보다도 주인의 그 선함에 감명받지 않겠는가?
다음 기회가 있다면 분명 이들은 약속된 삯보다도 더욱 열심히 일하며 그 은혜에 보답하려 들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일하며 더욱 성장해나가게 될 것이다.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먼저 된 자들에게는 기회조차 사라지고 만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억울함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만 것이다.
 
이 집주인은 분명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이 비유에서는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어진다. 어디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하여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겠는가? 언제든 우리의 성장을 위해 맡기실 뿐이다. 그 일을 함으로 우리는 한단계 한단계 더 나아가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일자리 교육 같은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노동력이 목적이 아니라 키워주고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에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단순히 일을 시키는 것만이 아닌 어떠한 의도로 일을 시키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주고자, 이해시키고자 그러한 번거로운 방식을 택하셨던 것이다.
 
베드로는 순전히 뿌듯함과 예상치 못한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순간 기대감이 차올라 그리 물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의 모습이 어떠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신 것이 아니었을까.
예수님 보시기에 베드로는 저 먼저 된 자들과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베드로의 마음에는 저 부자 청년은 재물을 버리지 못하는 모자란 나중 된 자이고 자신은 먼저 된 자와 같아 더 빨리 훌룡한 선택을 하였고 또한 더 많은 일을 하였으므로 마땅히 더 큰 보상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한 것이다. 삯을 바랄 수는 있다. 그러나 삯만을 바라고 일을 하는 것은 다르다. 삯 외에 다른 가치를 찾지 못한 채로 남게 된다면 결국에는 저 먼저 된 자들과 같은 삯꾼의 말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종국에는 거짓선지자로 전락하게 될 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사실 하나님 보시기에 먼저 된 자든 나중 된 자든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애초에 그런 구분이 없을지 모른다.이는 그저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나중 되었다고 생각한 저 부자 청년마저도 후에 결단을 내리고 베드로보다 더욱 열심을 내어 크게 성장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것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다. 그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대로 하나님의 일에 충성되어 배우고 성장하면 될 뿐이다. 보상은 그저 따라오는 것일 뿐 그 높은 가치를 놓쳐 삯에 좌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을, 이제는 이 비유를 듣고 깨달아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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