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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권 성경해석2 | 1.성경해석 세번째 - 이방인의 사도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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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5,772회 14-06-29 15:05

본문

 1. 성경해석 세번째 - 이방인의 사도 바울




논제의 이유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누가복음에 이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것이 데오빌로에게 쓰는 두 번째 편지인 사도행전이다. 누가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다면 사도행전은 바울을 중심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저자인 누가가 제시하려 했던 이야기들은 바울과 상당한 관련을 갖고 전개된다고 볼 수 있게 된다.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제시하려 했던 이야기들은 무엇이었을까?

 누가는 바울이라는 한 사람을 주께서 부르셨던 것과 그를 통하여 이루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설명하려 하고 있다. 단지 데오빌로에게만 그 뜻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읽는 모든 자들로 깨닫게 하려고 말이다.

 그가 바울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 그에게 감동하셨고 그는 그 감동을 충분하게 표현했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통하여 바울을 보아야 할 것이며 누가에게 임한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이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한다.

 이것은 이방인인 우리에게 상당한 의미가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누가가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 스스로도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임을 증거하고 있다. 율법 없이 자라나고 할례 없이 성장한 모든 이방인들에겐 바울의 가르침은 상당한 가치를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복음과 그가 살아가면서 제시했던 모든 교훈들은 우리 이방인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겐 반석과 같은 지식과 지혜를 보여주는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줄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이제 반드시 해석되어져야 할 성경인 것이다.

사건의 배경

예루살렘 교회의 형성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장 중에서…)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였다는 뜻은 무엇인가? 흩어져 버린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명절 때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흩어져 버린 유대인들은 타지에서 태어났고 그들 가운데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그 태어난 지방의 말을 더 잘 하였고 유대인의 말을 잘 하는 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경은 이들을 경건한 유대인이라 표현한다.

jerusalem

 흩어진 곳에서도 항상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실된 믿음을 가지려 했던 그들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곧 갈릴리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태어난 곳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어 주셨노라 증거한다.

 그 날에 회개하여 세례를 받은 자가 삼천이나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처럼 시작하여 급속도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해 나가기 시작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 교회는 큰 핍박에 사로 잡혔으므로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은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끝으로 흩어져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주의 말씀대로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고 그들로 말미암아 복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행전 8장 중에서…)

 누가는 핍박 이후로 예루살렘 교회에는 사도들만이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남아있어 떠나지 않았던 자들이 분명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이처럼 기록했던 이유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할례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저자인 누가는 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를 해 나가고 있다.

 때문에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예루살렘 교회에 남아 있는 할례자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이 할례자들은 분명 사도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할례자들은 베드로에게 이방인에 관한 일로 인하여 힐문하던 자들이다. 과연 이들이 누구관대 베드로에게 이같이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핍박 가운데에서 조차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지 않았던 그들은 아마도 나이가 많은 그리고 나름대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여겨지는 장로들과 같은 자들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할례를 받고 철저한 유대인으로 성장했던 그들이 이제 예수를 주로 섬기면서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사도일지라도 이들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입장으로 보여 질 수 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이들에게 변명하는 말이나 어투를 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사도행전 11장 중에서…)

 베드로는 아마도 여러 차례 이들과 대화를 시도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 때마다 쉽지 않은 대화임을 느꼈고 나름대로 이들을 대하는 방법을 익혔던 것으로 생각된다. 베드로가 변명하여 이르기를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였고 그들은 답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였다.

 이들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생활 했던 제자들은 여러 상황 속에서 이방인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생각을 보았기 때문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버림을 당하고 이방인들에게 오히려 이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으며 또 천국은 누구든지 침노하는 자들에게 열려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사도행전 2장 중에서…)

 베드로가 말한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라 함은 분명 유대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될 것을 익히 아는 베드로가 마치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됨을 원치 않는 자처럼 보이게 되는 것은 베드로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 할례자들의 문제였던 것이다. 또한 그가 비몽사몽간에 본 이상도 자신의 상태를 본 것이 아니라 이 할례자들의 상태를 본 것임을 알아야 한다.

 베드로의 본 것을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이들 할례자들인 것이다. 이 할례자들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예루살렘 교회는 더욱 이상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베드로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허락되었을지라도 그들은 다른 모든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운영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주의 영이 각 사람을 이끄사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게 하셨는데 그들은 이를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그들은 이런 일들을 알지 못한 채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기들의 세력을 키워 나가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로 유입되게 된다.

사울의 회심

  사울이라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로마의 시민으로서 태어났으며 베냐민 지파요, 가말리엘 수하의 제자로서 성장하게 된다. 그는 젊지만 그 재능과 지혜로움으로 인해 무언가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기를 원했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는 자신을 준비해 나갔다. 어느날 공회가 열렸고 스데반의 설교와 그에 대한 재판을 보았다. 그는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다.

 그 후에 사울은 하나님을 위하여 이단의 무리를 없애는 일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 그리고 그는 더욱 열심이 있어서 다메섹에 가서 그 도를 좇는 모든 사람을 잡아다가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큰 빛이 자기를 둘러 비추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면서 성경 속에서만 보았던 일이 자기에게도 일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에게 둘러 비추는 빛이 하나님의 빛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에 그는 땅에 엎드러졌고 소리가 들려왔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당혹스러웠다.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가 아닌 하나님을 자신이 핍박하고 있다니, 사울은 두려움이 닥쳐왔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은 더욱 난감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나는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한 것일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진짜 그리스도요, 하나님이란 말인가? 내가 지금까지 믿고 따르던 유대교가 거짓이고 내가 핍박하던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었단 말인가? 사울은 소경처럼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사흘을 보내었다.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구원을 간구했다. 그 때에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되는 환상을 보게 된다. 한편 아나니아는 대답하기를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이곳에 왔음을 말한다. 그러나 주는 그에게 그 모든 것이 주께로 난 것임을 깨닫게 하셨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이 사람이 바울이다.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이방인들의 사도였던 것이다. 바나바라는 형제에게 도움을 받아 예루살렘에까지 오게 된 바울은 다른 제자들과 사도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말과 변론은 대단하였고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를 인하여 헬라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꾀하더니 형제들이 먼저 알고 그를 다소로 내려 보내게 되었다.

1차 전도 여행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사도행전 11장 중에서…)

 공교롭게도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진 자들이 아닌 그 흩어진 자들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된 유대인들에 의해 이방인들의 교회는 세워지게 된다. 이 때에 바나바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고 안디옥에 이르러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께로 난 것임을 보고 기뻐하게 된다. 그가 다소로 가서 바울을 청하여 함께 안디옥 교회에 이르러 큰 무리를 가르치기 시작하는데 1년이나 그들과 함께 거하며 가르치더니 이때에 비로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

 안디옥 교회에 있을 때에 주의 성령이 시키는 일을 위하여 이 둘을 따로 부르시게 된다. 안디옥 교회는 이 일을 위하여 금식하고 안수하여 이 둘을 보내었고 그들은 비로소 주의 영을 좇아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것이 첫번째 전도 여행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더라.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사도행전 13장 중에서…)

 거짓 선지자였던 바예수는 바울의 증거하는 복음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힘썼다. 때에 바울은 박수 엘루마를 주목하여 보고 정확한 그의 상태를 말하였고 하나님의 행하실 일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이로 보건대 바울의 믿음이 상당한 수준에 이미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주님께로부터 어떠한 것들을 들었는지 또 어떠한 것들을 배웠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매우 직접적이고 분명한 것들을 주님께로부터 들었음은 확실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나바는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알린 자요, 안디옥 교회에서도 함께하기를 청했던 자이다. 엄밀히 말해 그가 먼저 된 자이며 바울은 나중 된 자였던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하여 예비된 자였고 바나바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을 뿐인 것이다.

 때문에 바울의 보는 세계가 바나바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바나바의 믿음은 상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바울을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 바울과 함께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에 요한의 일로 인하여 바울과 심하게 다투고 따로 행하는 자가 된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있으니라.” (사도행전 13장 중에서…)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다. 그러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았고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게 된다. 그 무리를 인하여 시기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곧 그곳에 거하는 유대인들이었다. 왜 이들이 시기하는 자들이 되었는가?

 이것은 성경을 자세히 미루어 살펴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유대인들은 각 지역에 흩어졌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으며 또한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되었다. 때문에 처음에 많은 핍박을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엔 큰 승리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이방 가운데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선민으로 인정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후손들은 단지 그 결과 속에서만 살아왔을 뿐 신앙에 있어서는 상당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 몇몇은 거짓 선지자 엘루마처럼 신분이 높은 이들의 제사장이나 선지자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의 이름을 듣게 되고 이에 대한 분분한 생각을 갖게 된다. 결국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에 그들은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의문과 두려움만을 남기고 자신의 남은 삶을 다만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와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전하자 그들은 매우 기쁜 마음으로 또한 두려운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 들이게 된다.

 또한 이방인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가 많았으므로 그들 또한 자기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서도 지도자들과 같은 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를 깨닫는 것보다도 많은 이들이 자기들로부터 떠나 바울과 바나바를 좇는 것에 대해 더욱 불쾌하게 생각했다. 성경은 이를 그들이 시기했다라고 표현한다.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13장 중에서…)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낸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서 발에 티끌을 털어내고 이고니온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 남아 기쁨과 성령에 충만하여 믿음을 이루는 자들이 된다. 이고니온에 이르러 다시 회당에 들어가 주의 복음을 증거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게 된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유대인들이 대적하게 된다. 저자인 누가는 이들을 순종치 않는 유대인들이라 표현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전하신 복음을 그들이 순종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운데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했었다. 때문에 그들은 이방인들을 선동하였고 사도들에게 악감을 품게 한다.

 하지만 주께서 사도들의 손으로 표적을 행하게 하사 자기의 복음을 증거하시니 무리가 둘로 나뉘어 하나는 사도들을 좇고 또 하나는 유대인들을 좇게 되었다. 이에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관원들을 동원하여 사도들을 돌로 치려고 달려드나 미리 알고 피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처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된다.

 하지만 안디옥에 있던 유대인들이 두 사도를 뒤따랐고 이고니온에 이르러 그곳의 유대인과 합하여 바울을 찾은 후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치게 한다.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줄로 알고 루스드라 성 밖으로 던진 후에야 그들은 자기의 곳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제자들이 둘러선 그 자리에서 바울은 다시 일어나 성으로 들어갔다가 다음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증거 한 후에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그 후에야 그는 돌이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장로들을 세우고 주께 그들을 부탁 드린다. 그리고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인 안디옥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바울의1차 전도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사도행전14장 중에서…)

2차 전도 여행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행전15장 중에서…)

 유대로부터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서 복음을 믿게 된 이방인들에게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들을 인하여 많은 변론을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된다.

 왜일까? 이들이 유대로부터 왔다는 것은 과연 어디로 부터이기에 예루살렘까지 올라가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왔으며 그리고 유대교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에까지 가서 이 일에 대한 근원을 해결해야만 했다.

 저자인 누가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베니게와 사마리아에 들러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기쁘게 하였다고 말한다. 저자의 의도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방인들이 돌아온 일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겐 매우 큰 위로와 기쁨일 것이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기쁨이 된 이 일이 또 다른 이들에게는 왜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예루살렘 교회는 이 사실을 듣고 매우 이상한 일을 말하게 된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이들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바리새파 사람들의 신앙을 의심해 볼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들의 신앙은 구약의 율법에 기인하고 있다. 구약의 율법엔 만약 이방인들이 유대인의 하나님의 유월절을 참예하고자 하면 이방인들에 관한 규례대로 할례를 행한 후에야 이스라엘의 법을 따르게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니라.” (출애굽기12장 중에서……)

 이들은 왜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처럼 율법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일까? 과연 예수를 믿기는 했던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원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다. 이방인은 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었어도 섬기지 못하였고 오로지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이 되셨던 것이다. 작은 민족이었던 이스라엘에게는 보호자가 되었고 또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을지라도 이방인들에게는 오히려 그 섬김조차도 허락치 않으셨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을 듣고 사모하여 섬기고자 하면 할례를 행한 후에 그 율법을 지킴으로 어느 정도 가능해졌던 것이다. 이제 그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자기 백성이라 하시며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매우 좋지 않은 사실이다. 이제 자기들만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 일은 매우 기이한 것이었으며 이스라엘으로서는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또 다른 의미로서 바울에 의해 다시 증거함을 받게 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태복음21장 중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예수를 버림으로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버려 자기 백성이 되지 못하게 하셨고 이방인들로 오히려 자기 백성을 대신케 했음을 증거하게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개개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일지는 모르나 이스라엘을 선민으로서 의식하고 있는 어떤 이들에게는 엄청난 사실이 되는 것이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에 바리새파 중 믿는 어떤 이들이 일어나 할례를 주고 율법을 지키라 하게 된다. 이때에 사도와 장로들이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증거하게 된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사도행전 15장 중에서…)

 베드로는 분명 처음부터 알고 있는 듯하다. 변론이 있기 전부터 분명한 답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처음엔 이야기하지 않고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야 이런 답을 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관한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증거하는 증거를 알았을 것이고 또한 같은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방인에게로 갈 수 밖에 없는 바울의 심정과 마찬가지로 베드로 또한 이방인에게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에게는 바울을 보내셨고 베드로는 단지 이 일을 돕는 역할만을 할 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또 다른 입장에서 그에게 맡겨진 일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 (사도행전15장 중에서…)

 문제의 근원은 분명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었다. 하지만 주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돌아가 말씀을 담대히 증거했고 이제 다툼은 모두 끝난 것처럼 보였다.

“수 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사도행전 15장 중에서…)

 각 지역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나아가 이 일을 말하고 굳게 하기 위하여 다시금 전도여행은 두 번째로 시작되게 된다. 하지만 그 시작부터 쉽지 않은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바나바가 마가라 하는 요한을 함께 데려가고자 한 것이다. 그는 처음 여행 때에 수종드는 자로 함께 했으나 여행의 시작에 근심을 안기고 떠났던 자이기도 하다.

 때문에 바울은 그를 데려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였고 바나바는 그를 데려가고자 하여 심하게 다투기까지 하였다. 결과적으로 바나바는 요한을 데리고 떠났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주의 은혜의 부탁함을 받고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고니온을 지나 루스드라에 이르러 디모데를 만나 그를 제자로 삼아 데려가게 된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사도행전16장 중에서…)

 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마게도냐 첫성인 빌립보에 이르게 된다. (이때에 누가는 이 일행에 함께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두아디라를 거처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회당이 그곳에 있으므로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가르치게 된다. 이곳에서 가르칠 때에 경건한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듣고 믿었으나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대적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먼저 바울의 일행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 일에 대비하여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준비하였고 소동을 일으켜 바울 일행을 잡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서 복음이 전파되었고 많은 이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 밤에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었고 그곳에 있는 회당에서도 주의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사도행전 17장 중에서…)

 하지만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듣고 베뢰아로 와서 무리를 소동케 하므로 형제들이 먼저 바울을 거기서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고 디모데와 실라는 아직 거기에 머무르게 되었다. 바울을 인도하던 자들이 아덴까지 이르러 디모데와 실라를 속히 데려오라는 명을 받고 떠난다.

 바울이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고, 철학자들과도 변론하니 아덴에서 또한 주의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다.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회당에 들어가 주의 말씀을 증거한다. 디모데와 실라도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와서 함께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일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사도행전 18장 중에서…)

 고린도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가르친후에 에베소에 이르러 또한 회당에서 가르쳤고 많은 이들이 함께 하기를 구했으나 거절하고 주의 뜻에 그들을 의탁하고 그곳을 떠나 배를 타고 가이사랴에 상륙하고 안디옥으로 내려가 얼마간 있다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제자들을 굳게 한다. 이로써 바울의 두번째 전도 여행은 끝이 난 것이라 해야겠다.

3차 전도 여행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사도행전 18장 중에서…)

 고린도에서 만났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이제 상당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다.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때에 일년 육개월을 그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같은 생업을 가진 연고로 함께 거하며 생활했었다. 때문에 그들은 바울에게 많은 것들을 듣고 배웠으며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 같다.

 이제 그들이 아볼로라 하는 사람을 보고 그가 믿음이 있으므로 데려다가 더 자세히 주의 복음을 풀어 가르치기 시작한다. 아볼로는 에베소에서 떠나 아가야로 가고자 하였고 교회들은 그를 기뻐하였다. 이는 그가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기기 때문이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러 어떤 제자들을 만나니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성령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아마도 아볼로의 제자들인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사도행전 19장 중에서…)

 바울이 석달동안 회당에서 주의 말씀을 가르쳤고 어떤 비방하는 자들을 인하여 회당에서 떠나서 제자들을 따로 세워 두란노 서원에서 이년 동안 매일 그들을 가르치게 된다. 주께서 바울의 손을 통하여 기이한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일이 있게 되었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여 회개하였고 마술을 행하는 많은 이들이 그 책을 모아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불사르기까지 했다. 이 때쯤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아데미신상을 만들어 크게 이를 보고 있었는데 바울이 우상을 섬기는 일을 금하게 하므로 그 직업의 사람들을 불러 소동을 일으켜 해하려고 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여 경영하였고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작별을 고하게 된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 행전 20장 중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저자인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고자 했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 있어 매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믿는 자들이 수만이나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들은 과연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었을까? 그것은 그리 알기 어려운 사실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그들을 바라볼 땐 매우 난감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 사람들의 믿음을 진지하게 판단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교회와 함께 말이다. 이들은 분명 예수를 믿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서 믿는다는 표현은 다른 어떤 의미로도 쓰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사도행전 21장 중에서…)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마치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지칭하는 것처럼 들리지 아니한가? 이것은 사실 매우 간단한 내용이다. 장로들이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유대인 중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이 있으나 그들 대부분은 율법을 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자들이라는 뜻일 뿐이다. 때문에 장로들은 그들이 바울의 온 것을 들으면 결코 용납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에게 알려 줄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되어버리게 된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온 이유가 있었다. 심령에 매인바 되어 예루살렘으로 향한 결정적인 이유,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 서게 되었을 때에 밝혀지게 된다. 예루살렘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던 바울, 이제 이 바울을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숨겨진 모든 것들은 밝혀지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스데반이 죽은 후에 큰 핍박이 일어나서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지 않고 흩어졌었다.

 사도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사마리아로 땅끝으로 멀리 멀리 성령의 이끄시는 곳으로 모두 흩어져 복음의 증거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예루살렘 교회는 또 다른 이들에 의해 다시 형성되게 되었다. 이들은 유대인이었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였으며 물로 세례를 받았을지언정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를 이루었고 또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이끌었으며 그 가운데에서 여러 가지 조직들을 만들었고 장로들과 집사들 같은 여러 직분들을 만들어 갔던 것으로 보여진다.

 사도들은 그들을 가르치려 했다. 하지만 강퍅한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버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리고 만다. 주께서는 이 교회를 향하여 가르치는 것을 사도들에게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로는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몇 번의 시도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의 말씀대로 그들은 복음의 본질인 성령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데 연연해 할 뿐이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려 했고 예수를 향한 사랑과 믿음은 모두 율법을 지키는 열심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들이 왜 이렇게 하였는가 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내용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으며 그 인도하심 또한 받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성령이 계셔야 할 자리에 율법과 규칙들을 두게 되었고 그것들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믿음을 인정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뒤로한 채 스스로의 규례와 계명들을 만들어 성령이 계셔야 할 자리에 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결코 틀릴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면 반드시 구원을 얻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교회가 성경을 기반으로 자기들의 법을 만들고 그것들을 지키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생각한 것이 거짓이 된 것처럼 이 또한 거짓이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된다. 이로 보건대 과거의 그들은 거짓된 교회를, 심하게 뒤틀려진 교회를 다만 이루어 갔던 것으로 보여질 뿐이다.

 이유는 단 하나,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아니한 자들이 교회를 이루고자 했기 때문인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계시는 전이라는 뜻이었고 그 교회는 성령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따라 판단했고 자기들의 생각대로 모든 것들을 정의하려고만 했을 뿐이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2장 중에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끈 매임의 증거는 유대인들의 믿음을 전반적으로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 그것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온 결정적인 이유였던 것이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요, 제사장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리스도를 받아 드렸기 때문인지 그들은 결코 율법을 버리지 않았다.

 율법을 버린다는 사실 자체를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먼저 아셨고 그들이 결코 그곳에서 돌이키지 않을 것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셨다. 사도들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여지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나름대로의 이런 배경을 안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방인들의 교회를 인하여서일 것이다. 예루살렘은 모든 신앙의 중심에 서려 했다. 왜냐하면 이곳 예루살렘이 성전이며 이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또한 사도들도 이곳에 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의 어리석은 욕심이 이 모든 것들을 이끌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자. 예배를 어디에서 드려야 합니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답하기를 메시아 곧 그가 오면 내가 진리를 알리이다 한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내가 바로 그니라 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르침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이 시대의 교회에게도 일반일 것이다.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에 그들은 당연히 그 이방인들에게도 율법의 짐을 지우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믿음으로 이방인에게로 나아가 너희가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고 전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한 이상을 보게 하시고 또 고넬료의 일을 보게 하심으로 이를 막도록 베드로를 이끄신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의 행적을 듣게 되었고 자기들을 공격하는 바울의 말을 전해 듣게 된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율법에 의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바울은 모든 문제의 근원에 예루살렘 교회가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그곳에 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께서는 그곳에서 많은 핍박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지만 그는 심령에 매인바 되어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결국 바울은 그들에게 나아가서 주의 말씀을 증거하게 되었고 왜 이방인에게로 갈 수 밖에 없는 지를 말하게 된 것이다.

논제1.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얻은 자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얻은 자이다. 따라서 그는 이방인의 사도이다. 주께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실 때에 주의 마음에 품은 것이 있었다. 이것은 주의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주의 마음에 먼저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내용이 아니겠는가? 이를 아는 것은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우리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 하겠다.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모습은 먼저 주님 안에서 그려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난 모습이 바울이라 할 수 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당시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큰 일임이 분명하다. 왜일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수많은 역사 속에서 철저히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임을 주장해 오셨기 때문이 아닐까? 이방인은 다 부정하며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다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뻐하여 섬기고자 한 이방인이 있다면 할례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조금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심이 분명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아브라함이나 모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위하여 이스라엘에게 선대하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이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세례 요한은 요단강가에서 물로 세례를 주던 자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요단강가에 이를 때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께서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한다. 이로 보건대 주께서 요한의 입을 빌어 말씀하심과 같이 그들이 그 돌과 같이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혈통으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의미가 있겠지만 하나님께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요단강가에 있는 돌들로도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혈통으로의 이스라엘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조차도 자기의 혈통에 연연해 하는 자가 아니었다. 만일 그가 혈통에 신경 쓰는 자였다면 이스마엘을 그 어미와 함께 내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고로 그는 행하였고 과연 이삭이라도 주앞에서 아끼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를 믿음의 본으로 세우시게 된다.

 주께서는 이스라엘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좇게 하시려고 철저히 그들의 하나님으로서만 행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교만하고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시작에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었고 그 과정 속에서 수없이 여호와를 배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성실함으로 모든 구원의 길을 그들에게 열어주신다. 먼저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보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잡아 때리고 욕보였으며 더러는 죽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이르기를 이는 내 아들이니 그들이 공경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은 오히려 이는 상속자니 그를 죽이리라함으로 결국은 십자가의 피 흘리신 예수를 보고야 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주의 마음에 있는 또 하나의 생명의 길이다. 곧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의의 길인 것이다. 이 길은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본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인 것이다.

 이때부터 복음은 모든 이들에게 열렸으며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들이 율법을 버리지 못할 것 또한 당연한 결과처럼 예측되는 일인 것이다. 만일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자들이었다면 주께서 행하신 일이 기이하게 여겨졌을 것이고 이방인에게까지 미친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이었고 사람의 계명을 따라 주를 섬기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한 자기들의 계명을 계속 만들었고 그것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 구하는 것을 본 그들이 심히 분노했던 것은 그들이 세운 잡다한 유전을 깨뜨리는 일이 되었기 때문일 뿐이다. 안식일에 몇 걸음 이상을 행하면 안된다던지 하는 그들의 유전, 그 쓸모 없는 유전들을 인하여 주께서 다윗의 일을 말하였으나 그들은 도무지 그 말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시금 이 함정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주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실 때에 이 유대인들과의 싸움을 생각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때문에 바울이 열심을 내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때에 그를 내버려 두심으로 후에 수많은 핍박을 당할 때를 예비케 하신다. 또한 바울은 이방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 있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가장 정확하고 자세하게 가르친다. 이는 주께서 친히 가르치신 것이며 그는 성실함으로 그 모든 것들을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이방인인 우리에게는 반드시 바울의 가르침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를 통하여 주께 나아가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랑하셨음과 그 이스라엘이 어떻게 주를 배반하였는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시금 그 유대인의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 함에 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되었으나 우리 이방인들은 어떠한 자들이 되겠는가? 우리 또한 그들과 같이 배반하는 자들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바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임의대로 행하게 된다면 바울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 뿐 아니라 그 결과마저 헛된 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제 이방인의 사도로 바울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알자. 주께서 바울을 통하여 세우시는 교회는 처음과 같지 아니하여 오직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이다. 처음부터 함께했던 베드로를 통해 이 일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바울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이 일을 하신 것을 기억하자. 사도 베드로는 교회의 심판을 이루시기 위함이요, 사도 바울은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교회의 기반을 세우시려 함에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반석)라는 심판을 피하는 자가 이 바울을 볼 것이고 바울의 가르침을 받은 자가 베드로라는 반석을 자기 안에 이루게 됨을 또한 보게 될 것이다. 이제 알라! 주께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아셨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어리석음을 따라 행할지라도 오직 진실함으로 주를 향하는 자가 있을 것이며, 또한 그들이 깊이 깊이 숨겨졌을지라도 주께서는 그들을 찾아내실 것이다. 그들을 향하여 손을 펴실 것이며 피할 반석이 되어 주실 것이다. 대적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키려 할지라도 주의 강한 손이 그들을 보호할 것이다. 아멘!

논제2. 바울의 복음 - 이 부분은 성경해석4번째에서......

논제3. 바울의 싸움은 거짓된 교회와의 싸움이다. - 이 부분은 성경해석4번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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