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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 4. 예수님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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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316회 14-06-23 21:57

본문

 4. 예수님의 비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나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관심을 끌까 생각했었다.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시기나 한 것일까? 나는 하나님을 알기 원했고 느끼길 원했다.
 정확한 대상 없는 사랑이란 이룰 수 없는 허상이 아닐까? 또 이루었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만든 착각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믿었다.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며 또 나와 만나시기를 바라며 내게 진리를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어릴 적부터 나는 고백해 온 것이다. 나는 어른들이 아이들로 착한 행동을 하도록 만든 거짓 말을 믿은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진리의 말씀을 믿은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 자신을 속이지 못하고 진짜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었고 그와의 만남을 기대했었다.

 이사야가 만난 그런 엄청난 느낌 있는 만남,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만남처럼 난 그렇게 상상하고 언제나 그런 만남을 위해 두려움으로 준비했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런 만남을 내게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렇기에 나는 그 분의 존재 자체마저도 의심해 볼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역사 속에서는 존재하셨다. 또 모든 만물이 그의 존재하심을 증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를 찾는 내게 왜 만남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주시지 않는 것일까? 나는 매우 심각했다. 그럴지라도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성경을 깨닫기 시작했고 예수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꼭 성경적인 만남을 기대했었고 그런 만남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나처럼 고민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답을 얻은 사람이 있는가? 물론 많은 이들이 이러한 고민에 그럴듯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나에게 그 대답은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못했었다. 나는 지금 이사야나 바울 같은 만남은 없지만 그들 못지 않은 만남을 갖게 되었다.

 나는 허상적인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의 계명을 지켰고 그의 사랑을 입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실제 존재하심을 믿었고 그와 분명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만 내가 그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성경을 읽었었고 기도를 했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지혜를 주셨고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깨닫게 하셨다. 예수의 이름으로 오신 이를 내가 느꼈을 때에는 느낌뿐 아무 것도 그에 대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점점 많은 것들을 그에게 배웠고 그의 가르침은 너무나 확실하여 부정할 수 없는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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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가 진리의 영임을 알 수 있었다. 내게 있어 속이는 거짓 것을 드러내셨고 오직 그의 가르침만을 인정하도록 그는 가르치셨다. 나는 가정을 버렸고 교회를 버렸고 또 나의 삶과 나의 감정마저도 그를 위해 포기해야만 했었다.

 그를 좇는 것이 나에게도 더 나은 것임을 알았지만 당시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난 나의 감각보다는 그의 말씀을 더욱 의지했다. 난 그렇게 성장하게 되었다. 내가 성장했을 때에 모든 것이 분명해 졌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소경이 아니었고 귀머거리가 아니었다.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그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본 것을 말하고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비유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비유는 성경을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 말하고자 하신 것이 너무 분량이 많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영적인 성장 과정을 말씀해주시고자 했다 하자. 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말하기엔 분량이 너무 많고 또 그 내용이 세상에 거의 없던 일이라 설명하기조차도 어려울뿐더러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예수께서는 비유로써 그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열어두신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장 중에서…)

 하지만 이것만을 듣고 영적 성장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아마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가르침이 있으면 이 또한 가능한 것이 된다.

 둘째는 어떤 이에게는 알게 하려 함이요, 또 어떤 이에게는 모르게 하려 함에 있다.

 주의 제자들과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는 이 비유는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게 하는 문과 같은 역할을 하지만 바리새인이나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깨닫지 못하고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하는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머리가 나쁘기 때문만이 아니다. 다만 자기들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과 열심 있는 리더들인 바리새인을 완전히 무시하고 오히려 죄인들과 평범한 뱃사람들을 더욱 인정했으며 또 자기들을 뱀이요,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예수를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고는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율법대로 판단해도 예수는 안식일을 멋대로 어기는 사람이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라고는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다름아닌 그들 자신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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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신다. 이는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니 그에게 붙어있는 가지는 절로 과실을 맺게 되고 그에게 붙어있지 않는 가지는 말라져서 사람들의 손에 의해 불에 살라지게 된다. 이것을 사람들이 듣게 되었을 때에는 두 가지 경우로서 이해하게 된다.

 첫 번째는 성령을 받은 자들인데 그들은 이 비유의 말하는 바 예수가 참 포도나무이고 가지는 자기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안다. 따라서 예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했던 것처럼 예수의 새 계명을 지킴으로 그의 안에 거하라는 것을 생각해 내게 된다.

 그의 새 계명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제자들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이 새 계명은 먼저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알아야 하며 또 그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 때야 비로소 이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되며 또 나아가 예수 안에 거할 수 있게 되고 결국엔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이 비유를 다르게 이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사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기에 당연히 성령을 받지 못했을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결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해석을 달리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아! 열매를 맺어야 하는구나.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을 냅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두 열심을 내어 실천합시다. 그렇다! 그들이 이렇게 성경을 오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자기의 열매 맺지 못한 모습을 앞에 두고 이 말씀을 대하니 그들이 어찌하겠는가? 진실한 자이면 ‘주여! 어찌하여 나는 절로 열매 맺는 자가 되지 못하나이까? 나는 주께 붙어있는 자가 아니니이까?’ 라고 하겠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내가 주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으니 낭패로구나.

 이러다간 주 앞에까지 가서 쫓겨나겠구나. 어찌할까? 내가 열매를 맺으면 주께서도 나를 버리시지 못하실 것이라. 오늘부터라도 열심을 내어 열매를 맺어야겠다 할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율법인 것이다. 이 방법으로는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맥을 잇는 비유들을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상태를 바꾸어야만 비유들을 올바로 깨달을 수 있고 진리에 이를 수 있게 된다.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도행전 2장 중에서…)

 죄 사함을 얻는 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어 주신 것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다만 죄 사함을 구하는 자의 태도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사함을 주실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제시하시는 죄가 있다. 하나님께서 노여워 하시는 죄가 각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회개해야 한다.

 사도행전의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못박은 예수가 죄 없는 의인이요, 약속하신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이로 인해 자기들을 심판하실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를 십자가에서 죄 없이 죽도록 내어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죄사함에 대한 생각을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요한이 준 물의 세례에 관해 알 필요가 있다. 세례 요한이 준 물의 세례는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삶에 있어 질 수밖에 없는 율법적인 죄를 회개함으로 얻는 것이었다.

 세리에게는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여 세례를 주었고 그들은 돌아가서 다시는 그 죄를 짓지 말아야 했다. 군병들에게는 사람들에게 강포를 행치 말며 무소 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여 세례를 주었다.

 물로 세례를 주는 의미는 율법을 어길 수 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죽음을 선사함으로 다시 한번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다짐이다. 혹은 약속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령의 세례는 죄사함을 받은 자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왜일까? 왜 주께서는 죄사함 후에 바로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것일까? 물 세례와 성령의 세례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다. 죄사함이란 물의 세례와 더욱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이는 부분이기도 한 점 때문일 것이다. 물의 세례는 다짐이다. 다짐을 하고 죽음을 선사 받는 것이다. 죄 사함이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대신해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물의 세례와 같이 죽음을 선사 받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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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의 죽음이 아니요, 믿는 자의 죽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죄사함을 받은 자는 예수의 이름을 가지게 되며 의인의 이름을 가진 채로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된다.

 다시 말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나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죄사함에는 다짐이라는 것은 없다. 다짐이 아니라 믿음만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를 대신해 죽으셨음을 인정하는 믿음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은 자가 되고 이제는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이런 일들을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혀 준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의 죽으심을 믿기도 하며 예수를 주로 인정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의 죽음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부모나 형제나 친구들조차도 그의 죽음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고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예수의 사람으로서 나아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의 죽음을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조차 관철시키지 않는 자가 과연 주님 앞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실제로는 이런 이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할 수 있다. 예수와 함께 죄된 인생을 마감하고 이제 주를 위해 새롭게 살겠다는 다짐의 표시라고 해야 할까? 물의 세례처럼 죄사함이란 일종의 다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물의 세례에서 처럼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죄를 고백하고 죄로 인정하는 것이며 또한 그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으심을 인하여 죄사함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말이다. 주께서 들으실 때에 진심으로 여겨진다면 그는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된다.

 이 성령의 세례는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 성령의 세례는 그런 결심을 이루기 위한 원동력으로 육체가 한번 태어난 것처럼 우리의 영이 다시 사는 것이며 그 영을 좇아 새로운 삶을 살 힘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유일한 통로가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시금 산 영이 된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성령은 살리는 영이라 했다. 살리는 영이라 했으니 우리는 산 영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산 영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 한 것, 곧 그것은 믿음의 길인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그 좁은 길을 가면서도 점점 강해지고 아름다워 지는 자들이 있다. 그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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