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예수의 이름으로 | 5. 산상에서의 가르침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감람나무 댓글 0건 조회 4,109회 14-06-23 22:01본문
5. 산상에서의 가르침
1).맛을 잃은 소금 (마 5:1-16)
“1)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2)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6)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7)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8)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9)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는가? 짠맛을 낼 수 있는 다른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 과연 이 짠맛은 무엇이기에 소금에서 밖에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인가? 이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조적으로 단맛을 내는 종류는 참으로 많은 것 같다. 대부분의 과일 속엔 단맛이 있으며 또 벌들은 그 단것을 모아 저장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단것을 좋아하며 또한 많은 생물들이 이 단것으로 음식을 삼으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짠맛을 내는 소금은 그렇지 못하다. 바다 속의 생물들은 소금물을 먹지 않는다. 그리고 땅의 짐승도 이 소금물을 먹으면 갈증에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만다. 그럼에도 이 짠 것은 필요하며 절실하다.
특별히 우리 사람들에겐 맛을 내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 이 짠 것이다. 반드시 적당히 넣어야만 하며 그럴 때에 비로소 제 맛이 나게 된다. 고기를 그냥 구워 먹거나 삶아 먹으면 먹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소금을 조금만 뿌려주면 고기의 참 맛을 알 수가 있게 된다.
소금만으론 결코 맛을 낼 수 없는 것들을 아주 맛있게 만들어 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소금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 성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맛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어 버렸다면 과연 그것을 먹는 자가 있겠는가?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일지라도 아무런 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은 버려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며 때문에 버려져 발에 밟히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 된다. 이 맛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소금의 맛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소금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서는 세상의 빛이라 한 부분을 이해해야만 한다. 너희는 소금이라 하셨고 또 너희는 빛이라 하셨으므로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되야 하겠구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있게 이 부분을 생각해본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가 세상의 맛을 내는 소금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함은 그러한 우리가 세상에서는 빛과 같은 존재들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서는 맛을 내는 소금이요, 세상에서는 어두움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빛은 어떤 것인가? 우선 이 빛에 대해 알아 보아야 한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였으니 이 빛이란 착한 행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착한 행실은 또한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착한 행실은 곧 이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것이다. 또 애통하는 것이다. 온유한 것이다. 의에 주린 모습, 긍휼히 여기는 것, 마음이 청결한 것, 화평케 하는 것, 의를 위하여 핍박 받고, 예수를 인하여 환란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복이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믿음 있는 자들이요, 전에 선지자들도 이런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착한 행실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착한 행실이란 바로 이런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걷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하며 또한 반드시 넘어야만 할 문제들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말씀하시는 대상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산에 오르사 말씀하실 때에 그 모인 자들을 향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많은 시간 속에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게 될 자들을 향하여 말씀 하신 것이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것이고 애통하는 자가 될 것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 선지자들도 이 같은 길을 걸어 왔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누가 진정으로 자기를 믿는 자들인지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복 있는 자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얻게 될 모습이며 그 성장 과정 속에 나타나게 될 모습인 것이다. 착한 행실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착한 행실이며 또한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이 빛을 사람들이 보게 되겠고 거짓으로 어두워진 세상을 이 빛을 인하여 다시 밝히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두려워하며 그 거짓된 삶에서 돌이키게 될 것이다. 아멘!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는 소금의 맛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맛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조차도 아무런 가치가 없게 느껴지기에 오히려 무시당하고 밟히는 자들이 될 뿐이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찌하시겠는가? 이런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조차 결코 그리스도인으로 인정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는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2).하나님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마 5:17-45)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 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급히 사화하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려 하심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려 하셨고, 우리로 하나님처럼 온전케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먼저 율법에 대한 생각은 보통 사도 바울의 서신과 야고보의 글을 대립적으로 이해해 나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바울의 편지에선 보통 율법의 폐함을 말함으로써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유로 몸의 기회를 삼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야고보는 자유의 율법대로 판단 받을 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한다.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처럼 죽은 것이라고 말함으로 율법의 완성적 입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이해의 결국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결정적 권한을 갖는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모든 결론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먼저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의 가르침에 정통한 사람이 되야 할 것이고 또 다른 제자들, 야고보, 베드로, 요한의 이야기를 알아야 하며 그 다음에야 비로소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이해는 가급적 보류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는 더욱더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만큼은 더욱 그러했다. 자칫 성급히 결론 지어 버릴 때엔 성경의 의도와는 다른 정 반대의 결론을 얻게 될 때가 있었고 실제로 성경은 그러한 오해의 요소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대답은 율법의 폐함보다도 그 완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형제에게는 사랑함으로 예의를 갖추어야 하며 송사를 받을 일을 했을 때에는 급히 사화 해야만 한다. 또 마음으로도 간음을 행하지 말며 차라리 눈을 잃거나 발을 잃고 마는 것이 유익하다고 한다.
음행의 연고 없이 이혼하지 말아야 하며 또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의 결론은 하나님처럼 우리도 온전해야 하며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의 완성적 취지는 예수 그리스도 말씀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처럼 온전함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으로 완전히 나타나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율법보다도 적극적이며 더 완전해진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이루는데 있어 과거의 방법(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은 더욱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를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분명한 주님의 의지인 것이다. 이것을 이루시는 방법은 은혜와 진리이며 또한 그의 새 계명이다.
또한 성령의 인도함만이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며 예수께서 이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으니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주님의 강한 의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주님이 제시한 생명의 길을 정확한 방법으로 좇아야만 할 것이고 하나님처럼 온전해질 것을 기대하고 바라보아야만 한다.
3).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 (마6:1-18)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 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두 번째로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 영광을 받기 위해 외식함으로 기도하고, 구제하였고 또 금식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영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영광을 얻지 못했으며 또 상을 받지 못한다. 이런 일이 항상 있었으나 고쳐지지 않았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께 인정 받기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 기도하고 있는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서 진실히 물어야 한다. 과연 어떤 것이 진짜 하나님의 뜻인지 물어야 한다. 진정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들으실 것이며 진리를 가르쳐 깨닫게 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외식하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겐 쓸데없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생각보단 하나님의 생각을 알려 해야 하며 또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외식이 아니다. 주께 묻고 그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은 외식이 아닌 진실이다.
또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 또 용서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그의 기도를 가증하게 여기신다. 우리가 먼저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우리에게 용서를 비는 이들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4).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6:19-34)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세 번째로 예수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보통 먹고 마시는 문제로 하나님께 기도 드린다. 또 집을 얻기 위해 기도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먹고 사는데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를 다니는 일도 사치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거지는 결코 교회를 다닐 수 없고 다만 구걸을 위해서만 교회를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공중의 새도 들의 풀도 주께서 입히시고 먹이시는 것처럼 그보다 귀한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것들은 아무런 연고 없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니 혹 그것이 힘들고 괴로울지라도 오히려 주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 먹을 것을 주옵소서 가 아닌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내게 주옵소서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육신의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돈을 원하며 평안하고 안락한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돈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렇기 때문에 돈을 땅에 쌓아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는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고 가르치신다.
다시 말해 외적인 방법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악을 버려야 하며 하나님의 의를 얻어야만 한다. 하나님처럼 사랑이라는 강한 힘을 소유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으며 모든 의문을 풀 수 있게 된다.
5).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마7:1-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네 번째로 예수께서는 주를 좇는 과정 속에서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 첫째는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눈 속에 있는 들보처럼 커다란 잘못이다. 몇몇 사람들 중엔 항상 다른 사람들을 헤아려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는 자들이 있다. 내가 경험한 교회도 그러했었다. 마치 판단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욱 뛰어나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음악을 비평하는 사람이 어찌 더욱 아름다운 음악을 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하나님 앞에 모두 서게 될 것이고 주께서 각 사람을 판단하실 것이다. 우리는 다만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주의 뜻만을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으면 그것을 말할 뿐 더하지 말아야 한다. 또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마치 자신처럼 여겨야 하며 위함으로 책망할 것이고 돌이키지 않거든 형제를 잃은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개와 돼지와 같은 사람에게 우리의 귀한 것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귀한 말씀이라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는 자라면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어 우리를 상하게 할까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기도 드려야 하는 세 가지가 있다. 구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우리의 죄사함이요, 찾을 것은 숨겨진 하나님의 본 뜻이며 두드려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닫혀진 관계의 문일 것이다.
이 세 가지를 기도할 때에 우선 되야 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도 이처럼 구함을 받을 때나 찾음을 받을 때 두드림을 받을 때에 받고자 하는 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대로 주께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다. 과연 어떤 분이시기에 이렇게 하시는 것일까? 이것을 깨달아야만 할 것이다.
6).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7:13-29)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께서 말을 끝마치실 때에 이 중요한 한 가지를 말씀하셨다. 곧 그것은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멸망의 길은 크고 넓어서 찾는 이가 많다. 이 넓은 길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는 자들이며 또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자들이며 권능도 행하는 자들이다.

마치 백화점을 열고 많은 이들을 초청하기 위해 행사를 하고 기념품을 주며 선전을 하는 것처럼 이들은 많은 이들을 자기에게로 모으기 위해 이와 같은 일들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그 권능을 따르는 이들은 멸망의 길로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이르시기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세울 때에 듣기만 하고 잊어버리는 자가 되지 말고 듣고 행하는 자가 되어 반석 위에 세워야 한다. 주께서 이 산상 보훈의 마지막에 말씀하신 이 이야기의 중요함을 깨닫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