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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헤아림. (첫번째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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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9,029회 10-10-14 19:00

본문

>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이는 분명 비판하지 말라는 말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무언가를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을 때에는 그 내용은 이미 완성된 그림과 같다. 그러므로 그 시작을 알리는 말에 너무 빠른 결론은 좀 섣부른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비판을 하지 말라는 뜻일까? 비판을 하라는 뜻도 되지 않을까? 전제를 붙이지 않는가? ~~하려거든 ~~하지 말라. 다시 말하면 비판 받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비판을 하라는 뜻도 된다는 것이다. 결국 비판을 하라는 뜻인지 하지 말라는 뜻인지 아마도 그 둘 중 하나가 예수님의 진정한 뜻일 것이다. 아마 50/50 정도는 되지 않을까?
 
> 이에 먼저 가설을 세워 보기로 한다. 첫번째 가설은 비판하지 말라는 교훈적인 이야기이다. 자신의 비판은 결국 돌고돌아 자기에게 돌아온다. 그러니 비판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한다. 또한 더 나아가 비판하는 행위 자체가 눈 속에 있는 들보와 같다고도 한다. 그리고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려면 먼저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정돈 빼줘야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기위해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가 된다.
 
> 두번째 가설은 비판을 하라는 것이다. 분명 이것은 일반적인 해석이 아니다. 어쩌면 아무도 이런 가설을 세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왜일까? 50/50인 이 이야기에서 100/0이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이는 예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는 이의 진정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말 자체에 집착하는 성향을 가진 이들이 꽤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번쯤 자신을 비춰 이를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가설은 이러하다. 비판과 헤아림을 하라. 그러나 그 비판과 헤아림은 반드시 먼저 자신을 향해야만 한다. 그렇게 행함으로써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 이 두가지 가설 중에 하나는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비판을 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 중에 정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답은 이어서 말씀하시는 '거룩한 것과 너희 진주' 바로 이것과 상관이 있을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렇다면 거룩한 것은 무엇이며 너희 진주는 무엇이란 말인가?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완성된 그림과 같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는가? 비판에 대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려진 완성된 그림의 시작이며 한 조각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조각은 거룩한 것과 진주에 대한 것이 된다.
 
 
> 이제 첫번째 퍼즐을 결정해야 한다.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비판을 해야만 하는가? 그 선택에 의해 하나는 말씀을 지키는 자가, 또 하나는 어기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변화도 있지 아니할 것이다. 나의 선택은 바로 비판하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 비판은 거룩한 것이 되며 헤아림은 값진 진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비판과 헤아림으로 먼저 나 자신을 면밀히 살핌으로써 외식하는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비로소 형제를 섬길 것이다. 물론 이 섬김은 비판과 헤아림이 된다. 그러나 만약 비판과 헤아림에 대한 선입견이 이미 자리잡고 있는 자라면 아마도 이것은 넘기 힘든 산이 될 것이다.
 

퍼즐

 
> 누가 비판과 헤아림이 악이라 말하였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자. 무엇이 비판이 아니며. 또 무엇이 헤아림이 아니란 말인가? 베드로가 예수님의 앞을 막아섰을 때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 안에서 은밀히 일어나는 일을 감지하신 예수님의 헤아림이 아니던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비판이 아닌가? 제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의 섬김은 그 중심에 예수님의 비판과 헤아림이 존재했던 것이다.
 
> 그렇다면 왜 비판과 헤아림을 악이라 생각하게 되었는가? 이 선입견은 어디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 아마도 '~~비판하지 말라'하신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단순한 선택에 의해, 혹은 섣부른 결론 때문에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는 숨겨져 버리고, 전혀 다른 뜻으로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억울하다 생각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또한 예수님의 숨겨진 의도라는 것에 있다. 허락된 자 외엔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 돌이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는가?
 
> 이제 두번째 퍼즐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거룩한 것은 비판이 되고 너희 진주는 헤아림이 되는 것이다. 비판과 헤아림을 통해 자신을 바꿔왔던 것처럼 형제를 향하여 비판을 하는 것이며 또한 헤아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랑의 법이며 그 섬기는 예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바리새인에게 핍박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것처럼 제자들 또한 그런 일을 당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개와 돼지처럼 진정으로 값진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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