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헤아림. (세번째 거짓 선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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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8,456회 10-11-06 09:39본문
> 비판과 헤아림은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것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비판과 헤아림을 숨긴 것은 언젠가 드러내기 위함이다.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이라는 이 한마디를 추가
함으로써 비판과 헤아림은 이야기 속에서 사라져 버리게 된다. 한번 이 말을 본문에서 제해 보도록 해보자.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 않는가? 단 한 구절이 빠졌을 뿐인데 비판과 헤아림은 그저 눈 속에 들보가 되며 외식하는 자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이라는 이 한마디 말로 비판과 헤아림이 악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역시 비판과 헤아림은 꺼림이 되며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는 편견을 심어주기엔 충분할 것이다. 물론 비판과 헤아림이 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며, 거룩한 것과 진주가 될지라도, 그것을 읽는 자는 보지 못하게 되며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비판과 헤아림이 숨겨진 것이라 하는 것이다.
>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다 한다. 그리고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한다고 한다. 물론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할 것이다. 설마 넓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이다. 그 문제는 거짓선지자에게 있다 한다. 이 거짓 선지자가 생명으로 인도하겠다고 사기를 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선지자는 좁은 문이다. 그 인도하는 길은 좁고 협착하다 한다. 때문에 그 길을 따르는 자들은 수가 적으며 그 길로 인해 매우 힘들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선지자들은 선지자 노릇을 아주 잘한다.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기도 한다. 또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기도 한다. 사기를 치는데 이 정도도 하지 못하면 어찌 많은 이들을 속일 수 있겠는가?
> 그러면 이 거짓선지자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예수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선지자 노릇도 잘하고 귀신도 내어 쫓고 권능도 곧잘 하는데 무슨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일까? 거짓선지자들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열매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도무지 모른다는 것이다. 때문에 비판과 헤아림이 이 이야기의 핵심인 것이다. 거짓선지자가 맺을 수 없는 아름다운 열매란 비판과 헤아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터가 되는 반석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좁고 협착한 길은 이 반석을 통해 이루어가야 하는 믿음의 길이다. 그러므로 참된 선지자가 맺는 아름다운 열매란 그 자신이 터가 되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 거짓선지자들은 노략질하는 이리다. 혹은 삯을 위하여 일하는 삯꾼과도 같다. 때문에 외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한다. 거짓선지자들은 비판과 헤아림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는 비판과 헤아림은 그들의 거룩한 것과 진주가 아니다. 겉만 잘 꾸민 거짓일 뿐이다. 그들이 진실을 말하지 못함은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진실을 볼 수 없는 소경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거짓선지자가 맺는 나쁜 열매란 참된선지자인척 하는 모든 행동들을 말하는 것이다.
>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다? 선지자 노릇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다? 그렇다면 바로 그들이 거짓선지자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들은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는 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는 법은 오직 좁은 문이라는 참된 사도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반드시 이 좁은 문을 통해 자신의 믿음의 터를 세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 모든 교회들은 불법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허락하신 모든 언약은 반드시 이 참된 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 똑같이 들으나 누구는 행하고 누구는 행치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행하는 것 자체가 반석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분명 비판과 헤아림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터인 반석이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하셨다. 좁은 문인 참된 사도들의 인도함을 따라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야 함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란 듣고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며, 행하지 않는 자란 듣고 깨닫지 못한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 지혜로운 자는 예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이를 깨달은 자와 같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거짓선지자라는 모래 위에 자신의 헛된 믿음을 세우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왜 응답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또다른 보혜사로서 이루어짐을 듣고도 이상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허가 사라져야하고 생수의 강이 그 속에서 흘러넘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왜일까? 사실은 그저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정말로 존재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종교적인 안위를 얻고 싶은 것이며, 심리적 평화를 얻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후 세계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그럴듯한 보험을 들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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