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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호와로라 첫번째 산 자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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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655회 25-09-0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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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호와로라 

첫번째 산 자의 하나님

 

 
 
"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 
 
 
 > 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묻는다. 이는 그들의 최종 난제였던 것이다. 만약 부활이 정말 있다면 이런 딜레마는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 있냐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사두개인들은 저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예수를 시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만 몰라서 물어보았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솔직히 대답해 주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고, 그래서 오해하였구나. 부활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천사들처럼 사람도 변화하게 된다 하신다.  
 
> 저들이 만약 하나님의 능력을 알았더라면 어쩌면 이 부활에 대해 오해하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그런데 성경도 몰랐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또 무슨 뜻이란 말인가?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이 사실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씀해 주신다. 또한 이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그런 의미라고도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저들이 아직 살아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 이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는 아주 복잡하고 머나먼 그런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우선 첫번째 장소는 하나님의 산 호렙이다. 모세는 근처를 지나다가 멀리서 불가사의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멀리서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그 나무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모세는 용기를 내어 그곳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사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던 것이다. 그런데 왜 여호와의 사자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에서 그렇게 나타나야만 했던 것일까?
 
> 이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를 보려고 다가오는 모세를 부르시며 자신은 네 조상의 하나님이라 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하면 이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들으면 그런 뜻이 된다는 말인가? 이는 마치 정답지를 봤는데 보고도 도무지 모르겠는 것과 같다. 정답지를 위한 해설집이라도 보아야 하는 것일까?
 
> 단 결론부터 말하겠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각각 부활에 관한 세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이는 마치 베드로에게 반석이라는 비밀이 숨겨져 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첫번째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라는 비밀이, 두번째 이삭에게는 약속의 성령이라는 비밀이, 마지막으로 야곱에게는 침노하는 자라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 세가지 요소는 부활과 영생에 관한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에서 그렇게 나타나야만 했던 그 진짜 이유 말이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신다. 그리고 그 이름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 온 세상에 그렇게 드러내고자 하신다. 영생의 조건은 세가지이다. 첫번째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질 것, 그리고 두번째 성령의 세례를 받을 것, 마지막으로 스스로 천국을 침노할 것, 이 세가지는 기본적인 영생의 조건이며 또한 영적장자의 조건이기도 하다. 장자란 첫열매를 의미한다. 예수를 통해 맺게되는 그의 첫열매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첫열매라 하였으니 두번째도 있을 것이며 세번째도 있을 것이다.  
 

"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 
 
 
> 세는 이곳에서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았고 또한 그의 보내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길의 숙소에서 여호와를 만나게 되었고 오히려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왜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이려 하시는 것일까? 그리고 십보라의 행위가 무엇이었기에 그를 놓으신단 말인가? 이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호와께서는 그를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를 살리려 하는 것이다. 마치 죽음의 신이 지나갈 때에 그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죽음을 피했던 것처럼 말이다. 모세는 할례를 통해 죽음을 피한 것이다.
 
> 하나님과의 언약에 있어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언약의 표징이 바로 이 할례가 아니던가?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 된다. 그러므로 약속의 성령은 저 유대인들이 아닌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그렇게 허락되어진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은 정말로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바울은 육체의 할례를 더이상 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한다.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령한 할례는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 우리는 예수를 주로 받아들이며 몸의 주권을 사실상 내어놓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옛자아의 죽음을 이룬다. 예수의 죽으심을 통해 자신의 옛자아의 죽음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첫번째 사망이다. 우리가 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영적인 거듭남을 위한 것이리라. 새로운 영적자아가 다시 태어나기위해 육체로부터 기인한 옛자아를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할례같지 아니한가? 우리가 하나님께 보여야 할 우리의 언약의 표징말이다. 이는 우리의 영적할례인 것이다. 
 
 
 
 
> 세는 어쩐 연고인지 이곳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실제로 그는 이곳에서 정말로 죽었던 것이다. 할례를 통해 죽음을 피했다는 말이 무엇이겠는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죽음을 피했던 것처럼 할례 또한 이와같은 죽음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말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육체의 할례는 단지 몸의 표식일뿐 그 진짜 모습은 우리의 영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할례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 바로 이것이 영적할례의 진정한 모습인 것이다.  
 
> 당시의 모세가 정말 이런 일을 전부 이해했다는 그런 말이 아니다. 어쩌면 그는 아무런 이유도 모른채 그곳에서 그렇게 죽을뻔 했던 것이 그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죽은 것이 분명하다. 모세는 어설픈 할례였을지라도 죽음을 이기고 생명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제 모세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된 것이다. 모세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니던가? 그는 그렇게 부활과 영생에 한걸음 더 다가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바로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장자라고 말이다. 그리고 만약 놓기를 거절하면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고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는 이를 끝까지 놓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하신다. 여호와의 이름에 숨겨진 진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애굽을 통해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시겠다 하였으나 과연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우리는 그저 애굽의 재앙들을 보며 놀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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