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마치 (열처녀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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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긍휼 댓글 0건 조회 153회 26-06-04 00:10본문
천국은 마치 (열처녀 비유)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여기 두 부류의 처녀가 있다. 다섯은 미련하고 또 다섯은 슬기 있는 자들이라 하신다.
과연 미련하다는 것은 무엇이고 슬기 있다는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성경 전반의 뉘앙스를 살펴보았을 때 미련하다는 것은 개선의 의지가 그닥 없는, 어찌보면 지혜로움과 양극단에 놓인 말처럼 보여진다. 또한 그 중간에 어리석음과 슬기 있음이 위치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두 부류 중 슬기 있는 자가 그렇게까지 뛰어난 자는 아니다. 실제로 등불의 원리를 아는 것이 그리 큰 지혜도 아니고 말이다. 반면에 미련한 자는 정말로 이상하다. 어찌 등불에 기름을 챙겨야 함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이 비유는 사실 앞선 비유의 상세 설명판이라 할 수 있다. 더 이해하기 쉽도록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 먼저 이 비유의 시작점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세상 끝에 있을 징조에 대해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여러 징조들을 말씀해주신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비하라, 깨어 있으라 라고 말이다.
두 사람 중 하나는 버려둠을 당했다. 이는 랜덤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슬기로움과 미련함. 그것이 그들의 차이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곧 깨어 있음에서 나온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 이 비유에서 등불은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간단한 장치 중 하나를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대에 맞춰 더 확장 시켜 생각해보자면,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스마트폰 정도를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많이들 사용하는 스마트폰의 원리에 대해, 혹시 아는가? 알려고 해본 적은 있는가?
이 기계는 어찌나 복잡한지 과정이 모두 분업화되어 다들 각자의 분야의 부품을 제작하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렇듯 이 장치의 구조와 기능, 원리에 대해 다 아는 이가 없을지라도 사용은 가능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조차도 능수능란하게 사용은 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그 복잡한 걸 굳이 이해하려 하겠는가. 그저 자신들의 편의만 채우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세상의 장치란 대부분이 그러하다. 심지어 만든 이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식을 제 것인 양 훔쳐 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세상에 있는 모든 장치에 대해 완전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무지함에 안주하는 그 사고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단지 장치의 원리에 대해 국한되어 말하는 것 또한 아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 그 자체의 원리와 구조에 대해 깨어 있는 자와 같아야 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세상 끝날에 징조들을 알아차릴 눈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비함이 아니겠냐는 말이다.
그런데 저 미련한 다섯 처녀들을 보라. 그럴 의지도 생각도 없다. 이 비유에서는 슬기 있는 자들의 뛰어남보다도, 저들의 미련함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극명히 드러내고 있다.
저 다섯 처녀들이 쫒겨난 것이 과연 기름을 챙기지 않음에서 기인했다고 보는가?
물론 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저들은 등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음에도 그 원리조차 제대로 파악할 생각조차 않았고 어떠한 예비도 하지 않았다.
무척이나 책임감 없고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어떠한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해보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따지고, 묻고, 재고, 그것이 어떻게 참된 믿음의 모습이겠냐는 것이다. 그토록 계산적인 것이 어찌 믿음이라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기본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내가 온전히 믿으려는 것이 하나님인지, 사단인지 그 정도는 분간하고 판단해야 할 것 아닌가. 다른 것도 아니고 내 삶을 맡기는 일인데 말이다.
당연히 거짓선지자들은 판단하지 못하게 방해할 것이다. 의심은 믿음에 위배 된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그 말을 따른다. 속아 넘어간다. 왜? 이들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자들이라 그런 것일까?
사실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 대상이 사단이든 하나님이든, 그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내 마음에 위안이 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들은 무지하기를 선택한다. 진실을 알려 하지 않는다. 이들의 이 사고방식이 바로 미련함의 근원인 것이다.
맹신은 무지함에서 나오며 이를 분간하려 하지 않는다면 결국 거짓선지자들에게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이미 택하신 자들마저도 미혹하려 한다 하시지 않던가.
그러나 미련한 자는 단지 무지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지에서 머물러 있기를 선택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모든 것을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하나님에게로 한 걸음씩이라도 가까워지도록 그렇게 발돋움하는 자세가 옳은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은 자들은 당연히 쫓아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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