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 첫 번째 차갑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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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톤페이스 댓글 0건 조회 152회 26-07-28 16:17본문
라오디게아
첫 번째 차갑거나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는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하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찬 것은 무엇이며 더운 것은 무엇일까? 해석하기를 찬 것은 모세의 지각이요, 더운 것은 엘리야의 심령이라 했다. 지성과 감성이라는 인식의 두요소를 균형있게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하신다. 이 말은 균형보다도 각각의 요소들이 무뎌지지 않게 하라는 말로 들리지 않는가? 차라리 날카로운 지성의 판단을 하든지, 아니면 뜨거운 감성으로 그 공감을 하든지 하라는 것이다.
> 모세의 율법은 날카로운 지성에 그 바탕을 둔다고 할수 있다. 예를 들어 네피림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체가 되었다는 그런 판단 말이다.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핑계삼아 의의 통치를 한다고 하더라도, 한낱 육체의 소욕 때문에 성령을 배반하고 육체가 되었다는 그런 판단을 받게된 것이다. 냉철한 판단, 곧 지성에 의한 판단은 감정을 배제하고 정교한 저울을 드는 것과 같다고 할수 있다. 과연 저울이 어느쪽으로 기울겠는가? 교회라 칭해지는 많은 이들이 예수를 주라 부르며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확신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사도가 없는 교회는 교회일수 없는데 말이다. 내 교회는 베드로라는 터 위에 세우겠다 하지 않으셨는가? 천국열쇠를 가진 사도라는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교회가 세워질수 있단 말인가?
> 무슨 목사자격증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사도라는 직분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생각해보자. 분명 바울은 열두제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사도가 된다. 이방인의 사도? 아니다! 그는 그냥 사도인 것이다. 당사자가 이방인의 사도라고 생각했을지라도 말이다. 당시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쓰여졌다. 세례요한이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 하지 않았는가? 이와 매우 비슷한 개념이다. 무슨 대단한 직분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써 사도라 칭해지길 그렇게 바랬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신다. 이것이 바로 사도의 시작점이다. 예수께서는 누군가를 보내신다. 영적 부르심을 통해 자신의 일꾼들을 그곳에서 그렇게 만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적여정을 통해 그들은 훈련을 받게 되고 장성한 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천국의 사자와도 같다. 왕의 보냄을 받은 사자처럼 이 땅에 천국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 그들은 천국열쇠를 가지고 땅에서 묶거나 풀거나 할수 있다고 한다.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자, 곧 사도는 천국의 파견을 받은 그의 사자와도 같은 것이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뜻대로 어린양을 먹이며 양을 치며 양을 먹이는 그런 충성스런 종과 같다. 그들은 예수를 말한다. 자신이 아니라, 예수를 소개하고 예수께로 그렇게 인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석과도 같은 터의 진정한 모습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충실한 증인이 되어 자신이 만난 예수를 말하고 증거한다. 본 것을 말하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높은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부와 권력을 통해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만난 예수를 말하고 예수를 대변하는 것이 그 전부인 것이다. 물론 그는 영적여정을 통해 상상할수 없는 그런 지혜와 능력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똑같이 여기서 함께 굴러야 하는데 말이다.
> 냉철한 판단이 서는가? 그러나 더욱 냉철하기를 바란다. 사도가 있어 교회를 이루었다고 해보자. 예수를 배우고, 예수를 믿으며, 예수의 이름으로 그렇게 살아간다고 해보자.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성령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게된다고 하는데 그게 잘 안되는 것이다. 영적인 존재로 거듭나고 또한 성장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겠는가?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말한다. 거듭남이 뭐에요? 어머니 뱃속에라도 다시 들어가야 하나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 한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다시한번 태어나야 한다는 건데, 당췌 이게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약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다면 그는 절대 그리스도인이 될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령의 인침이란 그의 보증과도 같다. 그가 우리를 인정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될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아들의 영이 있는가? 나는 정말로 성령의 사람인가 말이다.
>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를 다닌다는 그런 뜻이 될수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천국복음을 믿는다는 그런 의미이다. 천국복음이란 이렇게 시작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복음은 놀랍게도 회개로부터 그렇게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회개하라는 말인가? 아무거나 하나만 걸려라 하며 막 던진 말이겠는가? 아니다! 이것은 시작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태초에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죄와 관련된 그 무언가가 말이다.
> 천국복음은 사실 죄인을 위해 존재한다. 뭐 죄인이 아니라면 딱히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죄인따위를 위해 그는 오셨단 말인가? 선하고 좋은 사람들만 그냥 데려가시면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가해자인 죄인따위 그냥 죽어버리라지, 그게 정상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오셨고, 또한 그들에게 회개하라 말씀하신다.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는 것이다. 그는 죄사함과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기꺼이 내어놓으셨다.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죄인들에게 천국을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왜일까? 왜 죄인을 위해 그는 오셔야만 했던 것일까?
> 죄란 무엇일까? 죄란 법이 있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법이 없는데 어떻게 죄가 성립한단 말인가? 하나님의 나라엔 법이 존재한다. 사법고시라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로스쿨이라도 다녀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다. 그 아내인 하와가 따서 그에게 준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지말라 했던 것이 사실 법이었던 것일까? 그리고 정녕 죽으리라 했던 것은 그 형벌이고 말이다.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염려하셨던 것이 아니겠는가? 선악과를 먹고 죽을까 하셨던 것이다. 선악과에는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다. 사단과 관련된 비밀 말이다.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일까? 잘보면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을 만드신다. 그런데 동산 가운데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도 있더라 한다. 하나님을 그냥 평범한 농부라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누군가가 그의 농장에 몰래 숨어들어 이런 짓거리를 해놓은 것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딱 보고 아신다. 뭐지? 이 나무가 위험하다 여기신 것이다. 아담이 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게 되겠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불러 말씀하신다. 선악과를 먹지말라. 먹으면 정녕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돕는 배필인 여자를 만드신다. 죄에 대한 진실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선악과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을 따라, 그리고 생명나무에 숨겨진 알수 없는 어떤 진실을 따라 말이다.
>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그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염려하고 있다. 그에게 있는 죄의 소원이 위험하다 그리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잘보면 가인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대화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머물렀어도 가끔은 나와 그들을 만나셨던 것일까? 그러나 결국 가인은 죄인이 되어버린다. 그는 왜 동생을 그리도 잔혹하게 쳐 죽여야만 했던 것일까? 가인에게 있던 그 죄의 소원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이 죄의 소원을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뱀의 배후에 있는 진짜 주범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죄가 문에 엎드린다 하지 않는가? 무언가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며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범하면 결국 죄의 종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진짜 사망이다. 자아의 죽음, 죄의 종이 되는 것,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죄인들을 위해 오셨다. 생명의 빛으로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려 하심인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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